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대외개입 정책 ==== 브레즈네프는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동유럽에서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되던 [[프라하의 봄]]을 [[소련군]] [[탱크]]로 깔아뭉개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하였다. 다만 브레즈네프는 프라하의 봄 당시 군사 개입을 최대한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는 이 사태를 두고 "나는 온화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세게 때릴 수 있는데 그런 다음에는 사흘을 토할 것 같아요."라고 언급했다.[* 이 시기 브레즈네프는 정신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진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나중에 건강에 치명적인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해결을 못하며 사태가 악화되자 어쩔 수 없이 군사개입을 하고 만다. 하지만 이는 브레즈네프에게 값진 경험을 하게 해주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성공적 마무리는 그에게 큰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다.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은 1980년부터 1981년 말까지 소련 지도부를 고통스럽게 했었다. 소련은 [[프라하의 봄]]을 반복하여 이 사태를 끝내고 싶었지만 쇠약해졌음에도 무력을 혐오한 브레즈네프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또한 브레즈네프는 [[데탕트]]의 희망을 여전히 놓지 못해서 폴란드 침공이 데탕트에 악영향을 끼칠거란 공허할 뿐인 우려를했다. 그리고 정치국에서는 브레즈네프의 반대 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제 때문에도 침공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정치국에서는 협박을 하기로 결심하고 수십 만이 넘는 대규모의 [[바르샤바 조약]]군을 동원해 '자파드-81' 대규모 군사 훈련을 하며 폴란드를 [[프라하의 봄]]과 마찬가지로 폴란드를 침공할 것 처럼 연출을 했었다.[* 폴란드 서기장 카니아가 모스크바에 회담을 하러 왔을 때 우스티노프는 "카니아 동지, 우리의 인내심은 바닥이났소!"라고 소리지르며 "2주의 최후의 최후의 시간을 주겠소!"라며 압박을 했다.] 그와 함께 폴란드에 40억 달러의 막대한 지원을 하여 폴란드 인민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폴란드 경제는 쇠퇴하며 반소감정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렇게 연대노조는 계속되었지만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결국 소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81년 말 계엄령을 선포하며 이 사태가 진정되었다. 그동안 소련은 15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폴란드에 쏟아 부었다.[* 침공을 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소모되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에 소련의 [[원조]]를 받은 [[북베트남]]이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을 멸망시키고 [[베트남]]을 [[베트남 전쟁|무력 통일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의 패배를 남쪽에서 소모전만 벌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북베트남을 침공해서 전복했어야 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미국이 그럴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소련과 중국이 뒤에 있었기 때문. 브레즈네프는 북베트남에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미군이 북위 17도선, 즉 원래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국경선 위로 진격할 경우 '''소련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 경고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과 앙숙이던 마오쩌둥도 지속적으로 베트남에 군사원조를 했고, 확전되면 백만 대군을 투입하겠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미국은 공산게릴라에 시달리던 남베트남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했는데 더 나아가 북베트남을 침공한다는 것은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북베트남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성과 없는 [[소모전]]만 벌이게 되었고, 결국 철수로 이어졌다. 미국이 북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침공했으면 소련+중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져 [[3차대전]] 및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북폭도 중지했고, 결과적으로 피해만 입은 채 아무 소득도 없이 물러나게 된다. 거기에 중일관계 정상화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키프로스 전쟁]]에서도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를 이간질해서 [[북키프로스]] 건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앙골라 내전]]에 개입하기도 하였지만 소련은 처음에는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쿠바군이 정치국의 동의 없이 앙골라 내전에 개입한 것을 두고, 정치국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앙골라 내전 개입에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첫째로 쿠바군이 앙골라에서 패배를 소련이 관망하게 되면 쿠바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것을 두려워 하였다.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아공]]이 내전에 개입하면서 소련도 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미국]]의 개입으로 붕괴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정치국은 잊지 않았었다. 결국 정치국은 이 내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개입으로 인해 아프리카 남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늘었지만 쇠퇴하고 있는 [[데탕트]]가 더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 시기는 브레즈네프가 그토록 이루려한 데탕트가 빛나는 시기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련과 미국은 이 전쟁에 대해 서로의 신뢰를 확인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브레즈네프는 중동 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며 소련은 통제할 수 없다는 경고를 했었고, 닉슨은 이집트에서 소련의 군사고문단 17000명이 쫓겨나는 것에 대해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의도를 모르며 미국은 연관이 없다는 해명을 하였다. 또한 전쟁 발발 후 브레즈네프는 중동 전쟁에 개입을 주장하는 [[코시긴]]과 포드고르니를 성공적으로 제거하며 미국과 대립을 피하기 위해 전력으로 노력하였다. 결과 이 위험한 전쟁은 소-미 데탕트를 후퇴시키지 않았으며 소련, 미국의 데탕트를 더욱 공고히 하게되는 계기가 될수 있어보였다.[* 다만 소련의 입장으로써 이집트의 완전한 패배는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기에 이스라엘군의 과도한 진격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를 절정으로 데탕트는 쇠퇴해간다. 당시 브레즈네프의 데탕트 최대의 친구인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미국내 데탕트 세력은 닉슨과 함께 추락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브레즈네프 시기 [[아메리카]]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중남미 지원으로 인한 소-미 대립은 데탕트 외교에 치명적인 방해만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남미]]에서의 각종 사회주의 세력들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미국에 의해 강력히 통제되어서 중남미의 많은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운동 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친미, 반공 세력에게 무참히 패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 [[브라질]]의 사회주의 성향 대통령인 [[주앙 굴라르]]가 집권하자 [[움베르투 카스텔루 브랑쿠]]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사회주의적인 [[후안 에밀리오 보스크]]가 집권하자 [[미군]]이 직접 개입해서 친미 정부로 바꾸고, [[칠레]]의 사회주의적인 [[살바도르 아옌데]]의 정부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체 게바라]]와 그의 동료들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데탕트]]를 위시한 브레즈네프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하여서,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중남미의 사회주의 정부에게 대외원조적 형태의 차관지원 정도로 끝냈다.[* 일례로 1972년 소련에 간 아옌데는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원했지만, 소련 지도부는 데탕트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있던 터라 [[칠레]]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은 일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당시 남미의 민주화 인사들은 소련과 동맹국으로 대거 망명하는 일이 잦았으며 망명도 잘 받아줬다.] 그래서 브레즈네프 시기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전횡에 고통을 받은 것은 브레즈네프식 데탕트 외교의 과오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데탕트 체계가 붕괴되고 [[안드로포프]] 시기가 돼서야 멈춰서 당시 소련은 미국의 전횡에 적극적인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83년에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반발이다. 그리고 소련과 함께 공산권 양대 강대국인 [[중국]]과 공산권의 지도자 위치를 놓고 대립하여 중소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며, 1969년에는 우수리 강 유역의 다만스키 섬(중국명 전바오 섬)에서 양국 군대 간의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항목을 참조. 이처럼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은 세계에 소련의 영향권을 확장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게 1980년대가 되면 무려 세계 69개국의 나라들을 지원했지만 이 지원들은 당연하게도 국내 경제에 큰 부담만 되어 돌아왔으며 국제적 영향력은 그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점점 후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브레즈네프는 이 문제를 풀만큼의 건강하지 않았으며 그 [[안드로포프|후임]][[체르넨코|자들]] 또한 마찬가지일 예정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